이삭을 주우며 산길을 간다 - 1997년 7월 글쓴이최정숙 작성자 정보 작성자 Baesanggee 작성일 2020.11.02 23:16 컨텐츠 정보 목록 본문 이삭을 주우며 산길을 간다 최 정 숙 “아이구우 죽갔다아-.” 청 좋은 목소리가 골짜기를 울린다. 급할 것 없는 톤(tone )에 여운이 길어, ‘꼬끼요오’하는 닭 울음을 연상케 한다. 우리는 더운 숨을 몰아 쉬며 걸음을 멈춘다. “나는 저 소리만 들으면 위안이 돼요. 나보다 더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구나 해서.” “꼭 내가 할 소리를 대신 해 주는 것 같다니까.” 뒤를 돌아다 보니 저만치 골짜기 아래에, 싱글싱글 장난스레 웃는 회장님의 얼굴이 보인다. 깔딱고개를 만날 때마다 그는 ‘아이고오- 죽갔다’를 연달아 읊어대고, 우리는 그것을 신호로 걸음을 멈추며 회장님을 기다린다. “좀 쉬었다 갑시다아-.” 그는 곰 사냥의 달인, 밴쿠버 한인산우회의 박회장이다. 오늘은 목요일, 토요일에 있을 정기 산행에 대비하여 예비답사를 하는 날이다. 아홉명의 대원들은 지금 삼삼오오 짝을 이루고 대오를 지어 마운틴 스트라첸을 오르고 있다. 싸이프러스 주차장에서 시작된 볼품없는 이 길은 본시 겨울철의 스키슬로프여서 나무 한 그루 없이 가파르고 길다. 한 시절, 젊음의 열기로 빛나던 호사스러움은 다 어디로 갔는지. 눈녹은 자리에는 자갈이 뒹굴고, 울퉁불퉁 홈이 패인 채 초라하다. 거친 산 길을 오르는 걸음에 어디 속도가 붙던가. 칠월의 땡볕 아래 우리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면서 소나기 땀을 흘리는데 불청객 모기 들은 이게 웬 잔칫상이냐는 듯, 떼를 지어 달려 든다. 우리는 모기가 무서워 긴 소매 웃옷을 입은 채 소금 범벅이 되어, 손사래를 치고,. 자기 뺨을 때려가며 모기를 쫓는다. “아유, 모기가 입 속으로 들어갔네.” 호들갑스러운 쏘프라노. “나는 벌써 두 마리나 먹었는데요.” 강대장이 묵직하게 베이스로 받는다. 숨이 차도 입을 벌리면 안 되는 이유. 헐떡거리면 영낙없이 입이나 코로 모기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찜통 더위 속을 소매 긴 옷으로 무장을 하고 입을 봉한 채 비탈길을 오르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어서 얼굴은 온통 홍시로 익어가고 코에서는 단내가 난다. 새하얀 반바지에 반소매 셔쓰, 날렵한 차림의 강대장이 안쓰럽다는 듯 소리를 높인다. “거-, 좀 벗어요, 벗으라니깐.” “어-딜 숙녀한테….” 모두들 까르르 웃는다. 웃음 꽃이 화사하다. “모기가 왜 물어요,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정말, 강대장의 깡마른 팔은 말짱하다. “먹을 게 있어야 모기도 달려들죠, 왔다가 ‘어, 뼈다귀 쟎아’ 할 텐데-.” 숨이 차서 웃을 수가 없다. 저마다 허리를 꼬며 소리 없는 웃음을 웃느라 절절맨다. 산에 관한 한, 강대장의 해박한 지식과 경험은 따를 사람이 없다. 산악반 학생으로 만산을 누비다가 입대해서는 유격대원으로 낙하산도 탔고, 산악 훈련교관의 전력이 있는지라, 그의 입담은 언제나 좌중을 휘어 잡는다. 그가 작심 한 듯이 입을 연다. “암벽 훈련을 받는 등반대원들이 자일을 타고 벼랑을 내려올 때에는 다리를 적당히 벌리고, 몸의 중심을 잘 잡아야 안전하거든요, 한데 유독 여자대원들만이 이 안전수칙을 잘 지키지 않는 거예요. 위험하죠. 밑에서 올려다 보던 남자 교관들이 다급하게 악을 씁니다. “너, 다리 안 벌려. 죽고 싶어. 다리 벌렷-.” 힘들어 할 때마다 강대장은 웃지도 않으면서 우리를 웃긴다. “사과 먹고 갑시다아.” 회장님의 발성연습이 다시 시작 되었다. 매번 쉬어 가자는 게 민망했던지 가사가 바뀌었다. 우리끼리는 곁눈질을 하면서 못들은 척 지나치는데 “커피 먹고 갑시다아.” 성화가 빗발친다. 산행에서의 회장님은 언제나 꼴지. 그것이 다른 회원들에겐 위안이 된다. 모두 풀섶에 둘러앉아 간식거리를 챙기는데 재바른 ‘Y’여사가 얼른 나서며 “여기 커피있어요, 파출부 커피요”하며 권한다. 이 브랜드는 설탕을 푹푹 퍼 넣은 것이라나. 누군들 질까보냐 너도나도 끼어든다 .“이건, 블랙. 당뇨엔 보약이지요”. 조금이라도 자기의 배낭을 가볍게[?] 하려고 경쟁하듯 서로 먼저 권한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고난(?)을 함께하는 동지적인 훈훈함까지 더해 서로가 따뜻하게 배려를 한다. 급할 것 없는 발걸음에 마음이 여유롭다. 뒤쪽에서는 흥얼흥얼 시름없는 노래소리가 들려오고, 곰을 쫓는다는 방편으로 배낭에 달아 놓은 왕방울은 걸음을 옮겨 디딜 때마다 달랑달랑 맑은 소리를 낸다. 평화롭다. 싱그러운 산 내음에 내 몸에서도 향내가 난다. 살아 온 이야기, 살아 갈 이야기, 온갖 재담들이 산 안개 구름 일듯 난무하는 가운데 드디어 우리는 선경(仙境)에 닿았다. 정상이다. 눈 앞이 활짝 열리고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오르는 수고로움을 말끔히 씻어주고, 손에 잡힐 듯 마주한 ‘라이온스’산이 반갑다. 목적지에 닿으면 언제나 시장기가 먼저 마중 나온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K여사가 서둘러 펴놓은 돗자리에 모두 자리를 잡는데, S씨가 어지간히 급했던지 등산화 차림 그대로, 돗자리에 엉거주춤 몸을 비틀고 앉아 도시락을 꺼낸다. “어서 벗고 올라오세요~.” “또오?-” 자그르르-. 둑 터진 봇물처럼 웃음이 쏟아진다. 선경에 들어 구름 한 자락씩 깔고 앉았어도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중생, 선인이 될 수 없는 몸들이 민생고 해결에 매진한다. “우리 남자대원들은 한 십분 늦게 내려 갈 터이니, 여자분들 먼저 내려가시면서 볼일(?)들 보시죠” 강대장의 배려가 눈물 겹다. 올라 갈 때에 비해 내려오는 길은 평탄대로. 그렇지만 쉽게 생각되는 하산 길에서 사고는 더 빈번하다. 헛 딛고, 미끄러지고 또 가끔은 엉뚱한 길에 들어 헤메기도 하고.. 노년의 내리막이 더 조심스러움을 우리는 산에서 배운다 산정을 향하는 걸음은 또 얼마나 힘이 들던가. 오랜 시간을 애오라지 앞만 보고 전력투구하여 다다른 정점에 이르러도 산정에서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기어코 해냈다는 자긍심도 잠시. 성취의 보람을 심호흡 몇 번으로 보상받고, 멀고 가까운 산과 바다에 눈도장을 찍으면서 쌉싸름한 산정기에 몸과 마음 정신까지를 몇번 행구고 나면 이내 ‘타임’아웃. 내리막길이 다가선다. ‘인생을 이처럼 서둘러야만 하는가’ 회의가 인다. 그러나 어쩌랴. 어차피 우리는 할당된 시간만을 살아낼 숙명 뿐인 것을… 못다한 아쉬움과 허무함으로 해서 무엇엔가 손해 본 것 같은 억울한 심사가 되어 발길을 돌린다. 힘들여 올라와서도 잠깐, 조심조심 살펴 내려가야 하는 산길의 여정은 인생 행로와 별반 다르지 않다.. 기분이 좋으신지 회장님이 바리톤으로 길게 목청을 돋우신다. “아이구우 좋-다아-” 폭포수를 만난 듯 속이 후련해 지는데 투박한 우문(愚問)이 뒤 따라온다. “무얼 탄다구.?” ‘? ? ?’ 현답(賢答)들이 목을 움츠린다. 솟구치는 웃음을 눌러 참느라 두 뺨이 폭발할 듯 부풀고 목 울대가 뻐근하다. 산을 내려오는 길은 살아 온 삶을 되 밟아오는 길. 깊은 눈길로 살피면서 이삭을 줍는다. 아침에 오르던 구비구비 그 지점에 이르면, 이상하게도 오르면서 흐트러뜨린 웃음이며 재담. 심오한 느낌들이 하나하나 깨어나 고개를 든다. 키 큰 나무도 무표정한 돌맹이도 들려주는 이야기가 많다. 푸른 나무 잎새마다 글자가 되고 사진기가 되어 내 행적을 적는다. . 그 것들은 모두 나 아닌 내가 되어 깨달음을 주고 또 나를 경계(警戒)케 한다. 산은 내 스승님. 지엄하면서도 언제나 한결같다. 때로는 자상한 정인(情人)이 되어 기쁨도 설음도 보듬어 주고. 또 매운 시련으로 나를 담금질 하기도 한다. 깊은 사색에 잠기게 하는, 보리수나무가 되어주는 산. 나는 산에서 늘 새로워지고 산에서 그 무게를 더해간다. 산 아래에 이르면 뒷 걷이한 알곡이며 이삭들이 제법 대견하고 오늘 하루를 고시란 히 품어안은 산자락이 정답다. 내(來) 훗날, 오늘이 그리워 지면 묵은 일기장을 들추듯 나는 또 이 산에 들 것이다. (1997, 7) 관련자료 댓글 0개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로그인한 회원만 댓글 등록이 가능합니다. 목록